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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은 칼보다 강하다.

산으로 강으로 2005. 12. 26. 14:26
한동안 소식이 없던 영식이에게 다급한 전화가 왔다.
"형, 큰일났어 우리병원에 빨리 와!"
영식이의 당황한 목소리가 저녁식사 후 쇼파에 기대어 느긋하게 tv축구에 빠져있는 나를 깨우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우리 병원 보일러가 말썽이야 빨리 고쳐야 돼 환자들이 떨고 있어!"
나는 선뜻 납득이 가질 않았다. 큰 건물에는 만약을 대비해 항상 비상용 보일러가 대기하고 있다. 기존 보일러가 고장이 났을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영식이의 부탁은 거절해 본적 없지만, 보던 축구를 마저 보고싶은 게으른 생각에 가기가 싫었다.
"나 요즘은 저녁6시 지나면 일 안 해, 비상용 보일러 돌려.. 내일 갈게.."
"무슨 소리야? 비상용이고 뭐고 다 고장이라니까.. 지금 신문사나 방송국에서 알면 큰일나 빨리 와!"

한 마디로 기가 막혔다. 병원에서 기존 보일러와 비상용까지 모두 고장이라니.. 기술자가 교대 기사까지 포함해 다섯 이나 되고, 전기기사 세 명 포함하면 여덟 명이나 되는데 다수의 환자를 수용하는 종합병원이라는 곳에서 있을 수 없는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터진 것이다. 생각할 이유도 없이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병원을 향했다.


영식이와 나랑은 같은 시기에 자격증을 취득했다. 영식이가 자격증을 취득하면 나도 하고, 또 다른 자격증을 취득하면 나도 따라하고, 항상 영식이 뒤를 따라 다녔다. 그렇게 영식이만 따라 취득한 자격증이 다섯 개, 건물 기관실에서 가지고 있어야 할 자격증은 모두 보유하고 있었다.

자격증 취득 후, 종합병원에 이력서를 제출했으나, 영식도 제출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면접도 보러가지 않았다. 영식이와 나는 비교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식이는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리고, 대학까지 졸업했다. 자격증도 영식이 보다 늦게 취득했고, 경력 역시, 영식이와 비교 할 수 없었다. 때문에 늘 영식이에게 열등감을 항상 느껴야 했다.

나는 공업단지 내 공장으로 취직을 했고, 영식이는 자신이 원하던, 종합병원에 취업했다. 나랑 영식이는 똑같은 자격증으로 똑같이 취직해 급여는 비슷했지만, 근무 내용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나는 기계가 고장나고 잘 안 되면 머리 싸매고 잠도 못 자고 기름때를 벗삼아 근무했지만, 영식이는 달랐다.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연장이라곤 드라이버 하나 들지 않고 펜대만 굴리는 완전 업무직으로 바뀌어 있었다.

영식이는 인생은 자기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했다. 들어올 때는 기술직, 무관으로 들어왔지만 들어와서는 업무직인 문관으로 바꾸면 된다고 했다.

근무환경을 상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어떻게 스스로 바꿀 수 있는지, 내 상식을 뛰어넘는 대단한 영식이었다.

물론 대학까지 졸업한 영식이기에 그렇게 바뀔 수도 있겠지만, 어째든 능력 있는 영식이가 부럽기만 했다. 영식이는 낮에만 근무하고 나머지 네 명은 두 명씩 주야로 교대를 근무를 했다. 근무 방식도 영식이 마음대로 바꿨다고 했다.

최고의 책임자가 펜대만 굴리면 최고 기술자는 누구일까? 그래도 병원에서 최고의 기술자는 자격증 가지고 낮에 근무하는 영식이다. 그렇지만 실제 드라이버 하나 들지 않는 기술에는 깡통이고, 아래 직원 지시나 하는 업무직이다.

현재는 새 기계라 큰 문제는 없겠지만 만약에 큰 고장이 있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영식이 생각은 달랐다.

택시 운전기사 예를 들며, 운전기사는 기계까지 고치며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굳이 고친다면 상식적인 간단한 고장이나 수리하고, 큰 고장은 쎈타나 공업사에 의뢰하면 된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근무하고 싶었지만 성격상 그렇게 되지도 않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기계에 대한 신비스러움과 궁금증에 직접 다뤄야 직성이 풀렸고 옆에서 구경만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어느 때, 영식이는 내 근무처에 와 일 삼매경에 빠져있는 나를 보고 이런 충고를 했다.
"형은 그러니까 그 자리를 못 벗어나는 거유..! 큰 고장이면 기계 본사에 연락하면 잘 고쳐주고, 사소한 고장은 기사 시키면 되지.. 형처럼 막 일을 하려면 공부는 왜 했는데? 그냥 기사로 취직하면 되지, 쯧쯧! 얼굴이 아깝다, 참내..!!"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회사생활에 만족 못 한 나는 사업을 위해 부품 꿈을 안고 퇴사를 하게 된다. 영식이는 부장으로 진급을 했고, 좋은 직장이니 만큼 나올 이유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영식이 근무처에 놀러갔다가 기사 다섯 명이 고장난 기계를 해결 못해 쩔쩔매는 광경을 목격하고, 구경만 하지 못 하는 내 성격에 직접 해결하게 된다.

수리비를 주겠노라고 계산서를 올리라고 했지만 처음이고, 불러서 온 것도 아니고, 부품이 들어간 것도 없고, 손해 본 일이 없기에 여러 사람이 해결 못 한 것을 내가 해결했다는 뿌듯한 성취감만 가지고 나왔다.

그 후, 나는 종합병원을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병원 의사나 간호의 기숙사가 몇 채 있었는데 거기에서 일어나는 전기, 보일러, 세탁기 등등.. 문제가 있으면 단골로 내가 해결했고, 병원 에어컨, 냉동기가 고장나도 불려갔고, 온풍기 히터.. 등등.. 의료장비까지 고치러 들어갔다. 기계를 고칠 때마다 영식이는 농담 섞인 감탄사를 연발했다.
"형, 참 기술 좋아, 맥가이버가 따로 없어.. 사업 하지말고 내 밑으로 들어오지.. 보수는 충분히 처 줄께..!"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그 날도 영식이의 부름에 수리를 하고 평소와 같이 계산서를 끊자, 영식이는 이제 계산서는 필요 없다고 했다. 수리비 액수만 얘기하면 자신이 알아서 하겠노라고 했다. 이 또한 영식이의 능력이다. 워낙 많이 다녀서 그런가 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수리비만 받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같이 영식이 부름에 병원을 찾았는데 영식이는 없었다. 그런데, 교대반 기사에게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사장님, 부장님이 무슨 말 안 해요?"
무슨 뜻인지 몰라 물끄러미 기사 얼굴을 바라보자. 기사의 말은 이어졌다.

"병원에서 사장님을 채용한다고 했어요. 사장님 계산서가 계속 올라오니, 위에서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여기 기사들은 모두 뭐 하는 사람이냐고 야단을 쳤죠.. 그리고 차라리 사장님을 채용하면 병원에 큰 이익이 될 것이라고 했대요. 그렇게 되면 여기 부장님은 어떻게 되겠어요.. 사장님에게 밀리게 되죠.. 그래서 사장님 계산서를 안 올리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설비업소나, 전자업소의 계산서를 올렸어요.."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아아~~!! 그래서, 내 계산서를 안 받았구나! 까다로운 병원에서 계산서 없이 수리비가 쉽게 나오지 않을 텐데..'

나는 기사의 말을 듣고, 계산서를 필요치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농담처럼 내 밑으로 들어오라고 하던, 영식이의 말도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감히 내가, 영식이를 밀어내고 병원에 다시 취직할 그렇게 못된 위인? 은 아니고, 또다시 직장생활 할 이유 또한 없었다. 본의 아니게 영식이에게 폐를 끼쳐 미안하기만 했다.

그 일이 있고, 병원에서 부르는 일이 뜸해졌다. 이제 영식이와 기사들이 충격을 받아 자체에서 해결하는 것으로 믿었다. 상식적으로 그것이 정상이다. 기계 운전만 하는 기사만이 병원에 기사고, 고치는 기사는 따로 있다고 말하던 영식이가 한 풀 꺽인 것이다.

그리고 2,3년은 영식이와 연락 없이 지낸 듯 하다. 영식이도 전화가 없었지만, 영식이만 보면 왠지 열등감을 느끼는 나는, 연락 없이 지내는 기간이 오히려 편했다. 그리고 갑자기 당황한 영식의 전화를 받은 것이다.

병원 기계실에 도착했을 때 지체 높으신 분들 원장님을 비롯해 모두 내려와 있었다. 모두들 얼굴이 오뉴월 귀신을 보고 넋이 나간 듯 표정이 굳어있었다. 영식이는 나를 발견하고 악수도 잊은 채 상황설명을 했다.

어제 밤 2시부터 기계가 멈췄다고 했다. 기존 보일러는 일주일 전에 고장났는데, 기사들이 자신에게 보고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일이 터진 것이다. 자체적으로 해결하려고 했지만 해결 못 하고, 다른 곳에서 기사도 불러보고, 보일러 본사에 서비스를 요청했지만, 서비스 기사 말씀이, 10년이 넘은 기계이기 때문에 부품이 없어 고칠 수 없다고 했단다. 때문에 교체밖에 방법이 없다고..

허긴, 보일러 본사에서 남 애타는 마음을 헤아렸을까? 그저 자기네 영업에만 신경 썼을 것이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돈이 문제가 아니다. 시간이 문제였다. 큰 추위는 물러갔지만, 아직 밖에는 영하의 날씨, 2월이다. 그 큰 보일러를 교체를 하려면 빨리 해도 이틀, 늦으면 사흘..! 그렇게 되면 병원에 입원한 수많은 환자는 어떻게 되는가?

환자들의 대 이동이 시작되고, 신문에 날 일이고, 방송에 날 일이고, 종합병원에 큰 망신을 초래하는 일만 앞두고 있었다. 그러니 모든 병원의 책임자들은 앞으로 닥칠 일에 기가 막혀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정신이 나간 듯, 모두들 마지막으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큰 대란은 일어나지 않을 듯 하다. 겉만 봐도 보일러가 터진 것도 아니고, 수리가 안 될시, 최후에는 수동으로 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하나 검토하며 고장을 찾아나갔다. 고장은 다름 아닌, 콘드롤러 그 속의 부품이 고장이었다. 즉시, 부품을 교체했다. 그리고 시운전, 보일러는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불이 붙자, 구경하던 기사가.. "만세!!" 하며 박수를 쳤다. 그러자 침묵을 지키던 다른 기사도 같이 박수를 치며 고함을 지르며 기뻐했다.

지옥에서 빠져나온 느낌일까? 병원원장인 듯 한 분이 화색을 돌며..
"어떻게 고쳐졌어요?"
"네,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모두들 박수를 치고 기뻐했다.
"이제 각 층마다 히터가 들어갑니까?"
"조금 시간이 지나면, 곧 들어갈 겁니다."
그리고, 잠시 후 각층마다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정상으로 돌아갈 때 원장님의 진정한 고마움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기존 보일러도 고쳤다.

원장님은 고맙다는 악수를 청했고, 수리비는 어떻게 되냐고 물어왔다. 순간, 복잡한 계산이 내 머리를 스쳤다.

'얼마를 받지? 오만 원.. 오만 원은 너무 싸다 십만 원?? 아니지, 영식이 이놈이 처음부터 나를 부르지 않고 다른 곳에서 해결을 하려고 했어, 그리고, 그동안, 자체에서 해결 한 것이 아니라, 계속 다른 곳을 이용했어.. 괘씸죄 10만원 추가, 그리고, 축구도 못 보고 왔는데.. 또 위자료 10만원 추가 합이 삼십만원, 한 대당 삼십만 원, 두 대니까, 곱하기 2하면 육십만 원.. 그래 육십만 원으로 하자'

"아! 예, 한 대당 삼십만원, 육십만 원인데요." 그러자, 영식이 얼굴이 일그러졌다.
"형, 뭐가 그렇게 비싸?"
순간, 미안한 마음에 '농담이야!'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원장님 말이 더 빨랐다.
"드려야지요. 당연히 드려야지요, 무너지는 병원을 세웠는데, 천만 원도 싸지요.... 계산서는 천천히 써 주세요."
하면서 안 주머니에서 수표 한 장을 꺼냈다. 백만 원 이였다. 너무도 파격적이었다. 원래 계산서를 먼저 올리고 단계를 거쳐야 수리비가 나오는데, 수리비가 선이고 계산서가 후가 된 것이다.
"거스름 돈 없는데요."
"거스름돈은 필요 없어요.. 대신에 부탁합시다. 오늘밤 하루만 여기서 근무할 수 있으시지요?"
"네! 할 수 있습니다."
하루 저녁에 40만원을 버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돌아가는 건 기계가 돌아가지 내가 돌아가지는 않는다. 자면 그만이다.
그 날 저녁 오랜만에 영식이랑 기관실에서 안주 시켜놓고, 술 한잔을 마실 수 있었다.

위기는 벗어났지만, 이렇게 된 사건의 책임은 영식이가 제일 큰데, 영식이의 앞날을 어찌될까? 앞으로 전개 될 일에 영식이에게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하는데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영식아, 너 이번일 때문에, 불이익 당하지 않겠니?"
그렇지만 영식이는 당당했다.

"불이익은 무슨 불이익, 이렇게 된 상황은 기사들이 내게 미리 보고를 하지 않은 탓이고, 내가 형을 불러 위기에서 벗어났는데 불이익..?? 그런 것 없어!! 오히려 내게 상을 줘야지.. 형, 걱정마!!"

역시, 영식이는 대단했다. 왜 나는 영식이 앞에만 서면 주눅이 들고, 작아지고, 열등감을 느껴야 하는지.. 그 날 밤도 그렇게 보내야 했다. 역시, 펜은 칼보다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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