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두나무와 인연
몇 일 강원도 여행 다녀온 오후..
옥상에 올라가 당황하는 내 모습을 감출 수 없었다.. 큰 고무함지에 심어 놓은 앵두나무 잎이 힘없이 늘어져 있고, 고사 직전이었다.
서둘러 대야에 수돗물을 받아 급히 쏟아 주었다.
"죽으면 안 된다. 제발 살아다오!"
한번을 퍼다 주고 또 주고, 물이 철철 넘치도록 주었다.
그 동안 비가 오지 않은 하늘도 원망스러웠고, 여행을 떠나기 전, 물을 충분히 주지 않고 떠난 내 자신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저녁이 되어도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목욕을 하고 잠을 청하려 했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옥상에 올라갔다. 달빛에 비친 앵두나무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힘없이 늘어진 잎은 펼 줄을 몰랐다. 나는 앵두나무 앞에 맥없이 한참을 앉아있었다.
앵두나무와 인연은 내가 태어나면서 시작되었다
내가 태어나 첫 번째로 인연이 시작된 집은 기역자 초가집 이였다.
기역자로 된 안채가 있었고, 집 앞에는 소 키우는 외양간과 디딜방아간 두 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 주위에는 울타리가 앵두나무가 둘러져 있었고, 뒤에 큰 감나무가 있었다.
내가 태어날 때 내 가족은 부모님은 비롯해 형 둘과 누나 셋 나포함 모두 여덟 식구였다.
처음으로 시작된 인연의 집은 92년도 수해 때 남한강의 범람으로 잃고, 그 집 바로 언덕 위에 집을 지었다.
그 집에선 나에겐 두 번째 인연을 이어가는 집이었다.
첫 번째 집에서 세 식구가 빠진 누나와 작은형 그리고 부모님 그리고, 나 다섯 식구로 인연을 이어 갔다. 큰형은 뇌출혈로 하늘나라로.. 셋째누나와 넷째 누나는 시집으로 인연을 찾아 떠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두 번째 집도 충주댐 공사로 수몰 지역에 포함돼 부득이 정든 집을 떠나야 했다. 정든 집뿐이랴..
집 주위에 울타리로 심은 앵두나무, 집 뒤에 감나무, 집 옆의 호두나무와 자두나무, 개량종 살구나무, 모두가 수장될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 중에 나는 앵두나무와 감나무는 수장되기엔 너무도 아까운 나무였다.
앵두나무가 꽃을 필 때는 온 집안이 분홍 앵두꽃 속에 쌓여 풍경화 그림에 나오는 집보다 더 아름다운 한 폭의 환상적 그림이었다.
앵두가 토실토실 익으면 분홍빛 반투명으로 보석같이 아름다웠다, 입 속에 넣으면 약간 떫으면서 달콤한 앵두특유의 향~
앵두는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하지만, 그렇지 않다. 꽃 필 때, 꽃 색깔부터 틀리다. 흰색과 빨간색 분홍색 여러 가지다. 그리고, 앵두 또한 크기 또한 틀리고 익는 빛깔과 맛도 각각이다.
우리 집 앵두는 이 모든 앵두의 장점만 갖추었다. 앵두꽃도 분홍으로 예쁘고 앵두도 굵고 아름답고, 맛 또한 어느 앵두와 비교 할 수 없었다.
이 앵두나무를 이사라는 이유로 잃기 싫었다.
나는 뿌리가 무성하고 튼튼한 앵두나무 곁가지를 골라 두 뿌리를 캤다.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집에 심어 아름다운 인연을 이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나무 밑에서 작은 감나무 새끼도 하나 캤다.
우리 집 감나무는 속리산 정이품송 소나무처럼 삼각형으로 감나무답지 않게 너무도 아름답게 생겼고, 감이 나무 가지 끝에만 주렁주렁 열려 보기도 좋았지만, 감이 익으면 홍시 또한 다른 감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품질이 우수했다.
1982년 봄, 충주로 새로 이사한 세 번째 인연의 집에는 부모님과 나 세 식구로 인연이 시작된다. 시골에서 같이 지낸 형은 다른 인연을 찾아 떠나고, 막내 누나도 시집으로 인연을 찾아 떠났기 때문이다.
충주로 이사온 집은 작았다. 터까지 합해서 겨우 35평, 감나무와 앵두나무를 붙여 심었다.
이 나무들이 자라기에는 터가 너무 작았다. 하지만, 곧 이사할 계획이 있었으므로, 그때까지 참고 생명만 유지해 주면 된다..
그리고, 3년 후 1985년 가을.. 드디어 헌집을 팔고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 집이 네 번째 인연을 이어가는 집이다.
여기서 부모님과 나 세 가족의 인연은 내가 결혼하고 한식구가 늘어 넷이 되더니. 곳 다섯이 되고 여섯으로 된다. 아이를 둘을 낳았기 때문이다. 새 인연은 이렇게 이어가기 시작됐다.
새 집은 전에 살던 집에 비하면 배 가까이 되는 63평이었다. 집 양옆으로 앵두나무를 심고 그래도 크게 느껴지는 공간, 넓은 곳을 택하여 감나무도 심었다.
3년 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다시 다섯 식구로 줄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슬픔은 누구나 다 겪는 일이겠지만 내게는 처음으로 당하는 큰 충격이었고 너무도 큰 슬픔이었다.
그래도 어머니가 살아 계셔서 많은 위로가 되었고, 시골에서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나와 부모님과 늘 함께 한 앵두나무와 감나무도 같이 슬퍼하며 나를 위로하는 듯 했다.
앵두나무는 무럭무럭 자라 봄에 꽃을 필 때는 옛 고향집 꽃집을 방불케 했고, 벌떼도 많이 날아오고, 그 풍경을 아름답기만 했다. 토실토실하고 탐스러운 앵두가 익으면 온 집안 식구가 다 따먹고, 손님이 와서 따 먹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가을이면 감나무 가지 끝에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는 한 폭의 그림이었고, 우리 집은 시골 정원 집이 부럽지 않았다.
상강이 지나고, 서리 내리면 감을 수학하고 곶감도 만들고 홍시도 만들어 식구끼리 먹기도 하고, 대부분 집에 찾아오는 손님께 나누어주었다.
세월은 유수 같다고 하던가.. 이렇게 좋은 인연을 이어가던 집도 이제 인연이 다 하면 헤어져야 한다. 내가하는 사업을 이어 나가기 위해선 상가 주택으로 바꿔 이사를 해야 되기 때문이다.
집은 정을 뗄 수 있지만 앵두나무와 감나무가 고민이었다. 아쉬운 이별을 해야한다는 마음에 남몰래 속을 태웠고, 쉽게 마음을 굳히기 어려웠다.
새로 이사하는 집은 평수는 비슷하지만, 터가 전혀 없는 상업 목적으로 지은, 말 그대로 2층 상가주택이었다.
나무커녕 화초 심을 공간도 없었다. 앵두나무와 감나무는 내가 태어나면서 40여 년의 인연을 이어 왔는데 여기에서 헤어져야 한다니... 나는 포기하기 힘들었다.
감나무는 너무 커서 엄두도 못 냈지만, 앵두나무는 처음에 시골에서 캐 왔던 것처럼 곁가지 하나를 캐면 되기 때문이다. 앵두나무를 골라 캐서 나만 아는 곳에 심고 관리를 하려 했다.
하지만 어디로 옮겨 심든 내 집안에 없어 자주 못 본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디든 살겠지만 내 곁을 떠나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자피 인연은 여기서 끝이 아닌가?
어머니께서 내 고민을 읽으셨는지. 집에 있는 고무함지를 가리키며 옥상에서 저 함지에 흙을 넣고 키우면 되지 않겠느냐고 내게 아이디어를 주셨다. 좋은 아이디어지만 그 함지는 너무 작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다니다 누가 버렸는지 큰 고무함지를 보고 크게 반기며, 서둘러 차에 싣고 이사할 집 옥상에 올려놓았다. .
"그래 앵두나무를 큰 함지에 흙을 채우고 분재처럼 앵두나무를 심고 옥상에서 관리하면, 인연은 끝 나는 것이 아니다. 계속 이어질 수 있다."
옥상 장소 좋은 곳에 위치를 잡고 흙을 퍼다 담고 앵두나무를 심었다. 퇴비도 넣고, 물도 주었다. 이렇게 해서 앵두나무와 나는 다시 인연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감나무는 너무 탐스럽게 자랐지만 보고 싶으면 그냥 멀리서 가끔 찾아와 보면 된다고 생각했다.
새로 이사 오는 사람도 감나무를 좋아했고, 잘 관리하리라 믿었다.
2001년 봄, 다섯 번째로 이어지는 인연의 집은 어머니, 우리 부부 그리고, 딸과 아들, 다섯 가족으로 시작된다.
옛 집은 정원이 있었다면 새 집은 옥상이 있었다. 앞에는 초등학교, 주위에 똑같은 2층이 많아 옥상에 오르면 계명산도 보이고, 남산도 보이고, 밤에는 동산에 뜨는 달도 감상할 수 있고, 저녁이면 서쪽에 저녁노을도 감상할 수 있었다.
여기에 화분은 놓고 화초도 심고 고추, 상추, 쑥갓, 열무 등등.. 야채도 심었다. 옥상에 작은 정원을 꾸민 것이다.
그래도 그 중에 제일 중히 여기는 것은 앵두나무였다. 어머니께서 도 "이 앵두나무는 시골서부터 늘 우리와 함께 한 나무여." 하며 앵두나무를 아끼셨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옛집에 다녀와서 실망 스런운 말씀을 하셨다. 옛집이 문이 굳게 걸려 있고, 감나무는 병에 걸려 죽게 생겼다고 속상해 하셨다.
나도 감나무가 보고싶어 옛집에 가 보았다, 집주인은 투기 목적으로 집을 산 듯, 집은 굳게 잠겨 있었다. 정원은 없애려는 듯 앵두나무는 모두 뽑아 버렸고, 마당엔 풀이 무성히 자라있고, 마치 폐가를 보는 듯한 느낌 이였다.
감나무는 온통 흰 번데기 나방으로 공격을 받아 신음하고, 잎은 말라 비틀어져 흉한 모습이었다.
감나무는 봄부터 관리 해야한다. 예전엔 없던 흰 번데기가 낙엽 지는 가을부터 나무 가지에 다닥다닥 붙어있다.
나는 봄이면 사다리를 놓고 흰 번데기를 하나하나 떼어 내고, 바닥에 쌓인 흰 번데기를 신문지에 쌓아 태워 버렸다. 여름이면 소독도 해 주었다.
하지만 새 주인은 감나무 관리에는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주인이 허락만 한다면 문열고 들어가 소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집도 나무도 내 소유는 아니다. 모두가 부질없는 짓이다.
신음하는 나무를 뒤로하고 냉정한 마음으로 무거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리고, 늦가을에 낙엽이진 후 다시 그 집을 찾았을 때 그 감나무는 없었다. 새 주인이 베어 버린 것이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늘 같이 했던 감나무는 이렇게 인연이 끝나야 했다.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다시 만나고, 이것이 운명이란 것이다. 나는 나무보다 더 가까운 아버지도 잃었다.
아무 것도 아닌 나무 하나 가지고, 내가 슬퍼하다니.. 스스로를 위로하며 집으로 돌아와 옥상에 앵두나무 앞에 앉았다.
그래도 내게는 아직도 앵두나무가 있었다. 앵두나무는 아마도 내가 사는 날까지 같이 할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인연이라도 인연도 다하면 헤어진다고 했던가?
이사 오던 다음해 2002년 4월,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께서 88세의 일기로 세상과 인연을 다 하고 돌아가셨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쭉 같이 이어지던 인연은 어머니께서 떠나면서 이제 나 홀로 남게 되었다.
나는 옥상에 올라 앵두나무를 보았다. 앵두나무는 꽃을 화사하게 피우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처럼 앵두나무도 슬픔에 잠긴 듯 했다.
이제 내가 태어날 때 시작된 인맥 인연은 모두 떠나고 살아 있는 생명체는 마지막으로 앵두나무가 있었다.
앵두나무는 그해부터 내 쓸쓸한 마음을 알았는지 고무함지 속에서도 꽃도 화려하게 피우고, 앵두도 크고 탐스럽게 열리고 잘 자랐다.
올해도 꽃이 너무도 예쁘고 화사하게 피었지만, 내 한 순간의 실수로 고사 위기에 놓인 것이다. 이렇게 정든 나무마저 내 곁을 떠나다니..
내 아내와 내 자식들은 이해 못 하겠지만, 나는 너무도 괴로웠다.
밤새 뒤척이며 잠 못 이루고, 새벽이 되어 옥상에 올랐다.
앵두나무는 어제와 달리 잎은 정상과 같이 펴졌고, 생기가 돌며 나를 반기는 듯 했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목이 메이고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흘리는 감격의 눈물이었다.
"고맙다 앵두나무야! 정말 고맙다!"
올해 앵두 열매는 많이 떨어져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많이 열렸다.
오늘도 나는 몇 번을 옥상에 올라 앵두를 따 입 속에 넣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앵두를 아쉬워하며...
2004. 6. 15
몇 일 강원도 여행 다녀온 오후..
옥상에 올라가 당황하는 내 모습을 감출 수 없었다.. 큰 고무함지에 심어 놓은 앵두나무 잎이 힘없이 늘어져 있고, 고사 직전이었다.
서둘러 대야에 수돗물을 받아 급히 쏟아 주었다.
"죽으면 안 된다. 제발 살아다오!"
한번을 퍼다 주고 또 주고, 물이 철철 넘치도록 주었다.
그 동안 비가 오지 않은 하늘도 원망스러웠고, 여행을 떠나기 전, 물을 충분히 주지 않고 떠난 내 자신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저녁이 되어도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목욕을 하고 잠을 청하려 했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옥상에 올라갔다. 달빛에 비친 앵두나무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힘없이 늘어진 잎은 펼 줄을 몰랐다. 나는 앵두나무 앞에 맥없이 한참을 앉아있었다.
앵두나무와 인연은 내가 태어나면서 시작되었다
내가 태어나 첫 번째로 인연이 시작된 집은 기역자 초가집 이였다.
기역자로 된 안채가 있었고, 집 앞에는 소 키우는 외양간과 디딜방아간 두 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 주위에는 울타리가 앵두나무가 둘러져 있었고, 뒤에 큰 감나무가 있었다.
내가 태어날 때 내 가족은 부모님은 비롯해 형 둘과 누나 셋 나포함 모두 여덟 식구였다.
처음으로 시작된 인연의 집은 92년도 수해 때 남한강의 범람으로 잃고, 그 집 바로 언덕 위에 집을 지었다.
그 집에선 나에겐 두 번째 인연을 이어가는 집이었다.
첫 번째 집에서 세 식구가 빠진 누나와 작은형 그리고 부모님 그리고, 나 다섯 식구로 인연을 이어 갔다. 큰형은 뇌출혈로 하늘나라로.. 셋째누나와 넷째 누나는 시집으로 인연을 찾아 떠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두 번째 집도 충주댐 공사로 수몰 지역에 포함돼 부득이 정든 집을 떠나야 했다. 정든 집뿐이랴..
집 주위에 울타리로 심은 앵두나무, 집 뒤에 감나무, 집 옆의 호두나무와 자두나무, 개량종 살구나무, 모두가 수장될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 중에 나는 앵두나무와 감나무는 수장되기엔 너무도 아까운 나무였다.
앵두나무가 꽃을 필 때는 온 집안이 분홍 앵두꽃 속에 쌓여 풍경화 그림에 나오는 집보다 더 아름다운 한 폭의 환상적 그림이었다.
앵두가 토실토실 익으면 분홍빛 반투명으로 보석같이 아름다웠다, 입 속에 넣으면 약간 떫으면서 달콤한 앵두특유의 향~
앵두는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하지만, 그렇지 않다. 꽃 필 때, 꽃 색깔부터 틀리다. 흰색과 빨간색 분홍색 여러 가지다. 그리고, 앵두 또한 크기 또한 틀리고 익는 빛깔과 맛도 각각이다.
우리 집 앵두는 이 모든 앵두의 장점만 갖추었다. 앵두꽃도 분홍으로 예쁘고 앵두도 굵고 아름답고, 맛 또한 어느 앵두와 비교 할 수 없었다.
이 앵두나무를 이사라는 이유로 잃기 싫었다.
나는 뿌리가 무성하고 튼튼한 앵두나무 곁가지를 골라 두 뿌리를 캤다.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집에 심어 아름다운 인연을 이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나무 밑에서 작은 감나무 새끼도 하나 캤다.
우리 집 감나무는 속리산 정이품송 소나무처럼 삼각형으로 감나무답지 않게 너무도 아름답게 생겼고, 감이 나무 가지 끝에만 주렁주렁 열려 보기도 좋았지만, 감이 익으면 홍시 또한 다른 감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품질이 우수했다.
1982년 봄, 충주로 새로 이사한 세 번째 인연의 집에는 부모님과 나 세 식구로 인연이 시작된다. 시골에서 같이 지낸 형은 다른 인연을 찾아 떠나고, 막내 누나도 시집으로 인연을 찾아 떠났기 때문이다.
충주로 이사온 집은 작았다. 터까지 합해서 겨우 35평, 감나무와 앵두나무를 붙여 심었다.
이 나무들이 자라기에는 터가 너무 작았다. 하지만, 곧 이사할 계획이 있었으므로, 그때까지 참고 생명만 유지해 주면 된다..
그리고, 3년 후 1985년 가을.. 드디어 헌집을 팔고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 집이 네 번째 인연을 이어가는 집이다.
여기서 부모님과 나 세 가족의 인연은 내가 결혼하고 한식구가 늘어 넷이 되더니. 곳 다섯이 되고 여섯으로 된다. 아이를 둘을 낳았기 때문이다. 새 인연은 이렇게 이어가기 시작됐다.
새 집은 전에 살던 집에 비하면 배 가까이 되는 63평이었다. 집 양옆으로 앵두나무를 심고 그래도 크게 느껴지는 공간, 넓은 곳을 택하여 감나무도 심었다.
3년 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다시 다섯 식구로 줄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슬픔은 누구나 다 겪는 일이겠지만 내게는 처음으로 당하는 큰 충격이었고 너무도 큰 슬픔이었다.
그래도 어머니가 살아 계셔서 많은 위로가 되었고, 시골에서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나와 부모님과 늘 함께 한 앵두나무와 감나무도 같이 슬퍼하며 나를 위로하는 듯 했다.
앵두나무는 무럭무럭 자라 봄에 꽃을 필 때는 옛 고향집 꽃집을 방불케 했고, 벌떼도 많이 날아오고, 그 풍경을 아름답기만 했다. 토실토실하고 탐스러운 앵두가 익으면 온 집안 식구가 다 따먹고, 손님이 와서 따 먹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가을이면 감나무 가지 끝에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는 한 폭의 그림이었고, 우리 집은 시골 정원 집이 부럽지 않았다.
상강이 지나고, 서리 내리면 감을 수학하고 곶감도 만들고 홍시도 만들어 식구끼리 먹기도 하고, 대부분 집에 찾아오는 손님께 나누어주었다.
세월은 유수 같다고 하던가.. 이렇게 좋은 인연을 이어가던 집도 이제 인연이 다 하면 헤어져야 한다. 내가하는 사업을 이어 나가기 위해선 상가 주택으로 바꿔 이사를 해야 되기 때문이다.
집은 정을 뗄 수 있지만 앵두나무와 감나무가 고민이었다. 아쉬운 이별을 해야한다는 마음에 남몰래 속을 태웠고, 쉽게 마음을 굳히기 어려웠다.
새로 이사하는 집은 평수는 비슷하지만, 터가 전혀 없는 상업 목적으로 지은, 말 그대로 2층 상가주택이었다.
나무커녕 화초 심을 공간도 없었다. 앵두나무와 감나무는 내가 태어나면서 40여 년의 인연을 이어 왔는데 여기에서 헤어져야 한다니... 나는 포기하기 힘들었다.
감나무는 너무 커서 엄두도 못 냈지만, 앵두나무는 처음에 시골에서 캐 왔던 것처럼 곁가지 하나를 캐면 되기 때문이다. 앵두나무를 골라 캐서 나만 아는 곳에 심고 관리를 하려 했다.
하지만 어디로 옮겨 심든 내 집안에 없어 자주 못 본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디든 살겠지만 내 곁을 떠나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자피 인연은 여기서 끝이 아닌가?
어머니께서 내 고민을 읽으셨는지. 집에 있는 고무함지를 가리키며 옥상에서 저 함지에 흙을 넣고 키우면 되지 않겠느냐고 내게 아이디어를 주셨다. 좋은 아이디어지만 그 함지는 너무 작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다니다 누가 버렸는지 큰 고무함지를 보고 크게 반기며, 서둘러 차에 싣고 이사할 집 옥상에 올려놓았다. .
"그래 앵두나무를 큰 함지에 흙을 채우고 분재처럼 앵두나무를 심고 옥상에서 관리하면, 인연은 끝 나는 것이 아니다. 계속 이어질 수 있다."
옥상 장소 좋은 곳에 위치를 잡고 흙을 퍼다 담고 앵두나무를 심었다. 퇴비도 넣고, 물도 주었다. 이렇게 해서 앵두나무와 나는 다시 인연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감나무는 너무 탐스럽게 자랐지만 보고 싶으면 그냥 멀리서 가끔 찾아와 보면 된다고 생각했다.
새로 이사 오는 사람도 감나무를 좋아했고, 잘 관리하리라 믿었다.
2001년 봄, 다섯 번째로 이어지는 인연의 집은 어머니, 우리 부부 그리고, 딸과 아들, 다섯 가족으로 시작된다.
옛 집은 정원이 있었다면 새 집은 옥상이 있었다. 앞에는 초등학교, 주위에 똑같은 2층이 많아 옥상에 오르면 계명산도 보이고, 남산도 보이고, 밤에는 동산에 뜨는 달도 감상할 수 있고, 저녁이면 서쪽에 저녁노을도 감상할 수 있었다.
여기에 화분은 놓고 화초도 심고 고추, 상추, 쑥갓, 열무 등등.. 야채도 심었다. 옥상에 작은 정원을 꾸민 것이다.
그래도 그 중에 제일 중히 여기는 것은 앵두나무였다. 어머니께서 도 "이 앵두나무는 시골서부터 늘 우리와 함께 한 나무여." 하며 앵두나무를 아끼셨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옛집에 다녀와서 실망 스런운 말씀을 하셨다. 옛집이 문이 굳게 걸려 있고, 감나무는 병에 걸려 죽게 생겼다고 속상해 하셨다.
나도 감나무가 보고싶어 옛집에 가 보았다, 집주인은 투기 목적으로 집을 산 듯, 집은 굳게 잠겨 있었다. 정원은 없애려는 듯 앵두나무는 모두 뽑아 버렸고, 마당엔 풀이 무성히 자라있고, 마치 폐가를 보는 듯한 느낌 이였다.
감나무는 온통 흰 번데기 나방으로 공격을 받아 신음하고, 잎은 말라 비틀어져 흉한 모습이었다.
감나무는 봄부터 관리 해야한다. 예전엔 없던 흰 번데기가 낙엽 지는 가을부터 나무 가지에 다닥다닥 붙어있다.
나는 봄이면 사다리를 놓고 흰 번데기를 하나하나 떼어 내고, 바닥에 쌓인 흰 번데기를 신문지에 쌓아 태워 버렸다. 여름이면 소독도 해 주었다.
하지만 새 주인은 감나무 관리에는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주인이 허락만 한다면 문열고 들어가 소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집도 나무도 내 소유는 아니다. 모두가 부질없는 짓이다.
신음하는 나무를 뒤로하고 냉정한 마음으로 무거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리고, 늦가을에 낙엽이진 후 다시 그 집을 찾았을 때 그 감나무는 없었다. 새 주인이 베어 버린 것이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늘 같이 했던 감나무는 이렇게 인연이 끝나야 했다.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다시 만나고, 이것이 운명이란 것이다. 나는 나무보다 더 가까운 아버지도 잃었다.
아무 것도 아닌 나무 하나 가지고, 내가 슬퍼하다니.. 스스로를 위로하며 집으로 돌아와 옥상에 앵두나무 앞에 앉았다.
그래도 내게는 아직도 앵두나무가 있었다. 앵두나무는 아마도 내가 사는 날까지 같이 할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인연이라도 인연도 다하면 헤어진다고 했던가?
이사 오던 다음해 2002년 4월,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께서 88세의 일기로 세상과 인연을 다 하고 돌아가셨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쭉 같이 이어지던 인연은 어머니께서 떠나면서 이제 나 홀로 남게 되었다.
나는 옥상에 올라 앵두나무를 보았다. 앵두나무는 꽃을 화사하게 피우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처럼 앵두나무도 슬픔에 잠긴 듯 했다.
이제 내가 태어날 때 시작된 인맥 인연은 모두 떠나고 살아 있는 생명체는 마지막으로 앵두나무가 있었다.
앵두나무는 그해부터 내 쓸쓸한 마음을 알았는지 고무함지 속에서도 꽃도 화려하게 피우고, 앵두도 크고 탐스럽게 열리고 잘 자랐다.
올해도 꽃이 너무도 예쁘고 화사하게 피었지만, 내 한 순간의 실수로 고사 위기에 놓인 것이다. 이렇게 정든 나무마저 내 곁을 떠나다니..
내 아내와 내 자식들은 이해 못 하겠지만, 나는 너무도 괴로웠다.
밤새 뒤척이며 잠 못 이루고, 새벽이 되어 옥상에 올랐다.
앵두나무는 어제와 달리 잎은 정상과 같이 펴졌고, 생기가 돌며 나를 반기는 듯 했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목이 메이고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흘리는 감격의 눈물이었다.
"고맙다 앵두나무야! 정말 고맙다!"
올해 앵두 열매는 많이 떨어져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많이 열렸다.
오늘도 나는 몇 번을 옥상에 올라 앵두를 따 입 속에 넣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앵두를 아쉬워하며...
2004. 6.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