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좌 언제부턴가 왼쪽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다.]
대수롭게 생각지 않고 견뎌 보려했지만, 생각보다 고통이 오래가 불안한 생각에 평소에 잘 찾지 않는 병원을 찾게 된다. 의사 선생님의 충격적이 이야기..
퇴행성관절염이란다.
퇴행성관절염은 나이가 늙어서 찾아오는 병으로 관절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액이 줄었기 때문에 뼈와 뼈가 맞부딪쳐 찾아오는 병이란다.
때문에 윤활유 역할을 하는 이와 유사한 액을 넣어줘야 하는데, 일주일에 한번씩 액 주사를 다섯 번을 맞아야 된다고 했다.
안 맞으면 평생불구가 되거나, 말기가 되면 인공관절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협박에 할 수 없이 다 맞아야했다.
오른쪽은 말짱한데 왜 왼쪽만 찾아왔을까? 의구심에 인터넷 검색에 이리 찾고 저리 찾고, 관절염 카페에고 가입하고, 퇴행성관절염에 관한 상식은 모두 뒤져봤다. 그리고 해답을 찾았다.
퇴행성관절염은 반드시 나이가 들어 찾아오는 병은 아니고, 바르지 않은 자세에서 오랜 생활을 하다보면 찾아온다고 했다. 순간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나는 나이가 많아서 찾아온 것이 아니라. 바르지 못한 자세에서 관절염이 찾아온 것이다. 도를 닦는다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참선을 자주 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것도 오래하면 좋은 줄 알고 아주 오래도 앉아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참선을 하고 가부좌를 풀면 다리의 근육이 마비가 오고, 외쪽 무릎에 약간의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다. 도를 많이 닦은 사람은 하루종일 앉아 있어도 편하기만 하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수행이 부족해서 그렇지 자꾸 습관을 들이면 차차 낳아지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 나는 가부좌 참선에 그렇게 집착을 했을까?
그것은 도에 관한 집착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왜 또 도에 집착을 했을까? 그것은 태어났기에 죽어야 한다는 공포 때문이다.
그렇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죽은 후의 공포는 서서히 사라졌다. 죽은 후에는 천당을 가든 지옥을 가든, 아님 육도 윤회를 하든, 현재에 나의 뇌 세포는 죽었기에 살아있을 때의 기억은 할 수 없다. 따라서 사후에 세계는 있다 하더라도 현재의 내가 아니기에 생각 할 수 없고, 또 현재의 나로 존재하지 않기에 신경 쓸 필요 또한 없다.
문제는 현재의 살아있을 때 生老病死였다. 生老病死 중 生老까지는 괜찮지만, 病死가 문제였다. 태어났을 때 어떻게 태어났는지 모르고 태어나고 또 늙지만, 죽을 때는 병마와 싸우다 고통 속에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병마와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을 많이 봐왔다. 그 중에서도 나와 가장 가까웠던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말기 간암으로 진단을 받고 약 8개월을 병마와 싸우다 돌아가셨다. 치료한답시고 병원에 다녔지만, 낳기는커녕 고통만 더하시다 결국 돌아가셨다.
그리고 10 년 후, 어머니께서도 병마와 약 1년을 싸우시다 결국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그 고통은 옆에서 간호하는 사람도 못봐 줄 정도였다. 한 세상 살 때는 얼마나 잘 살았는지 모르지만, 마지막 갈 때는 옆에 간호하는 사람도 아픔이 전가 될 정도로 큰 고통이었다.
아버지께서 마지막 가시는 날, 사흘을 못 주무시고 고통만 받다가 돌아가셨다. 지금도 병마와 싸우다 세상을 떠나고 있는 많은 사람들..
왜, 사람은 죽을 때 꼭 병이 걸리고 견디기 힘든 고통 받고 죽어야 할까? 죽을 때 내 마음대로, '나 이제 때가 되어서 간다.' 하고, 고통 없이 세상을 떠날 수는 없을까? 어차피 낳지 않는 병이고 가야할 길이라면,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병마와 싸우는 시간은 빼버리고 일찍 떠나는 것이 훨씬 낳지 않을까?
그렇지만 태어남을 내 마음대로 못 했듯, 죽는 것 또한 내 마음대로 못 한다. 나 또한 예외일 수 없다. 나도 언젠가 나이가 들면,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병마와 싸우다 고통 속에 죽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싫었다. 죽는 것은 괜찮지만 죽기 전, 고통은 정말 싫었다.
그렇다고 고통을 줄이기 위해 자살하거나 비명의 횡사는 더더욱 비참하기에 생각할 수 없다.
태어날 때 나도 모르게 태어났지만, 죽을 때는 내 마음대로 병마와 싸우지 않고 고통 없이 조용히 가까운 친지 불러놓고 유언을 하고 떠나는 그런 방법은 없을까?
1983년도로 기억된다. 조선일보에 큰 기사가 실렸는데 나를 흥분시키는 충격적인 기사였다.. 그 내용이 의심이 갔지만 사실이 아니라도 흥미진진했다 구산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셨는데 생과 사를 자신의 마음대로 자지우지 하셨다는 믿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구산 스님께서는 열반에 들기 전, 제자를 불러놓고 이제 떠나야겠다고 마지막 설법을 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아직 할 일이 남아있는데 그렇게 예고 없이 가시면 안 된다며 굳이 가시려면 내일 가시라고 부탁을 드렸다. 제자들이 간청에 구산 스님은 승낙을 했고, 다음날 다시 제자 모두를 불러놓고 가부좌를 틀고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이 내용이 사실일까? 나는 반신반의했지만 더 알아 갈수록 흥미진진했고, 나도 모르게 점점 깊이 빠져 들어갔다. 도를 많이 닦으신 분들은 대부분 가부좌를 틀고 앉은 자세로 세상을 떠난다고 했다. 어떤 스님은 서서 열반에 들기도 했고, 은봉이란 스님은 남들과 똑같이 열 반에 들기 싫어 물구나무서서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생사를 초월해 貪 瞋 癡를 버리고 살다, 떠날 때를 알고 가까운 친지를 불러놓고 아무 미련 없이 세상을 하직한다. 얼마나 꿈같은 이야긴가? 너무도 매력적이 이야기에 나는 인생의 최대 목표를 불교가 말하는 최고의 경지인, '성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두었다.
그리고, 불교에 관한 지식을 쌓기 시작했다. 반야심경을 해독하며 이해하려 노력했고, 금강경과 법화경, 등등.. 불교에 관한 책을 가리지 않고 읽었고, 도에 관해서도 노자와 장자 책을 삼매경에 빠져 수 없이 읽기도 했다. 그렇게 책만 봐서 지식으로 도를 깨우치면 얼마나 좋을까?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앎으로부터의 실천이다.
스스로 가부좌를 틀고 조용히 참선해, 생사를 초월한 깨달음을 얻어야한다. 나는 누구인가를 찾아야하고, 또 왜 태어나고 왜, 죽어야하는 이치를 알아야하고, 죽으면 사후에 세계는 진정으로 어떻게 되는지 알아야한다. 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야하고, 또 어디에도 존재함을 알아야하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이치를 깨달아야하고 또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인 이치를 알아야한다.
도는 절간에서 머리 깎고 앉아있는 스님만 닦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속세에 살면서 일반 중생도 다 할 수 있다고 들었다. 나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스스로 화두를 만들어 시간만 있으면 가부좌를 틀고 참선을 했다. 산을 좋아하는 나는 산에만 오르면 경치 좋은 곳을 찾아 가부좌를 틀고 참선에 들기도 했고, 집에서도 시간만 나면 습관처럼 옥상에 올라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참선에 들기도 했다. 그렇게 가부좌에 참선은 내 생활의 큰 부분을 차지하며 살아갔다.
그렇게 참선을 생활로 살았지만 특별하게 깨달은 내용은 없다. 단, 마음을 비우고 나 자신을 버리는 동안 편한 정신상태만 느꼈을 뿐, 가부좌를 풀 때는 왼쪽 관절의 통증을 느끼고 다리 전체의 마비현상은 항상 느껴야했다. 햇수로 벌써 10 년이 훨씬 지났다. 십년 공부면 도로아미타불이 됐다고 해도, 황진이는 옆에 남아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도대체가 진도가 없었다. 頓悟漸修라고 한번만 確哲大悟 깨치면 다시는 깨달을 것이 없다고 해서, 그 한번을 노렸지만 욕심이 너무 커서 그런지 깨달음은 없고 가부좌의 후유증인 관절염만 생겼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꼭 가부좌야 했을까? 숭산 스님은 외국에서 포교 활동을 할 때, 외국인은 바닥에 앉지는 못하는 습관이 있어서 방석을 둘둘 말아 앉기도 했고, 의자에 그냥 앉아서 참선에 들기도 했다. 참선은 정신이 문제지 꼭 가부좌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걸어다니면서 하는 행선, 또는 누어서 하는 와선, 그리고 앉아서 하는 좌선, 등등.. 세상이 선 아닌 것이 없는데 나는 쓸데없이 욕심을 부려 큰스님의 흉내만 내다가 가랑이만 찢어졌다. 그렇다고 참선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단, 가부좌는 포기를 했다. 현재는 방법을 바꿔 반가부좌를 하고, 늦은 밤이면 참선을 한다.
두 손을 동그랗게 모으고 단전 앞에 고정시키고, 허리는 쭉 펴고 앉아 눈은 작게 뜨고 45도 각도로 무의적으로 바라보며 단전호흡을 한다. 그리고 나 자신을 서서히 잊어간다. 그렇게 잊어가다 보면 갑자기 허리가 휘청함을 느낀다. 고개가 밑으로 떨어지다 깜짝 놀라 일어난 것이다. (졸음현상)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허리를 쭉 펴고 심호흡을 한 뒤 단전호흡을 하며 또 나을 비워간다. 아무 의식이 없는 상태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또 휘청함을 느낀다. 그러면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 바로 세우고,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으면 가부좌가 아니라도 무릎에 통증을 느낀다. 더 앉아 있으면 무릎관절에 무리가 간다. 촉새가 황새를 따라갈 이유가 없었다. 무릎에 무리를 주면 안 된다. 참선의 방법을 좌선에서 와선으로 바꾼다.
그리고 나 자신을 비워간다. 점점..
이윽고 깊은 경지..! 나 자신은 어디에도 없다.
내가 없으니 너도 없고, 우주도 없다.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다.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다.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다.
생이 없으니 늙고 죽음도 없다.
집착이 없으니 고통도 없고, 멸하는 것이 없기에 이를 도 역시 없다.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 또한 없다.
그렇게 밤이 새도록 있었나보다.
아침이 되어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에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요즘은 참선을 도를 닦으러 하는 것이 아니라, 수면의 한 방법으로 사용한다.
참선을 하면 잠은 아주 잘 온다.
20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