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주일에 술을 얼마나 마실까? 기록해 보면 적어도 4일에서 5일은 마시는 편이다. 가끔 3일이나 4일을 안 마실 때가 있다. 그러나 그때는 전날 심하게 술을 마셨거나, 감기에 걸렸거나, 하여튼 신상에 문제가 있어 못 마셨을 뿐이다.
그래도 아직은 술로 인한 건강에 큰 문제가 없는 걸 보면 이것도 행운이라고 해야 할지, 하늘이나 조상님들께서 주신 복이라고 해야 할지 어째든 남들보다 신체도 튼튼한 편이고 운도 좋은 듯하다.
실제 나와 같이 술을 많이 마셨던 친구들 중에 세상을 떠난 친구들이 꽤 있다. 그럴 때마다 술을 삼가 하자고 하면서도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적당히만 마시면 괜찮은데, 그 적당히 란 기준이 어떻게 되는지 헷갈린다.
1차만 마시고 끝나는 게 적당히 라고 하는지, 마신 술 병을 가지고 기준을 정하는지 그 기준이 애매모호하다. 어째든 다음 날에도 무리가 없을 정도를 마시면 적당히 라고 표현하면 옳을 듯하다.
내게 적당한 음주의 기준을 정하라고 하면 횟수로는 1차만 하는 것이고 주량은 소주 두병까지 라고 말 하겠다. 1차만 하고 끝내고 술은 소주 두병만 마시면 다음날 건강에 큰 무리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적당히 마시고 끝나면 뭔가 잃어버린 듯한, 허전하고 쓸쓸함이 밀려온다. 술에 취했으면 자면 되는데 이건 취한 것도 아니요, 안 취한 것도 아니다. 그렇게 어정쩡하게 취하면 잠도 안 오고 책을 보려고 해도 어지러워 글자가 눈에 안 들어오고, 티비를 봐도 그렇고, 그러다 옥상으로 올라가 하늘을 바라보면 갑자기 외로움이 엄습해 온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아! 중독이다. 이 느낌은 내가 알콜중독이란 뜻이다. 이겨야 한다, 더 마시면 안 된다. 견디자! 하면서 억지로 술을 참으면 찌뿌등한 느낌으로 술이 깨온다. 그리고 잠을 청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 까만 밤을 하얗게, 또 허전함이 밀려온다. 그리고 후회를 한다. 이 느낌이 너무도 싫은 것이다. 차라리 안 마시는 편이 낫다.
술을 적당히 마시면 나타나는 현상, 이 느낌이 싫어 친구들에게 더 마시자고 자꾸 꼬득인다. 아무리 꼬득여도 2차갈 분위가 아니면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더 마신다. 조금이라도 더 취해서 음주 후 허전한 느낌을 지우기 위해서 이다. 그러나 아무리 더 마셔도 1차로 끝나면 허전한 느낌은 그 대로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2차 갈 친구를 꼬셔서 기여코 맥주, 소주 실컷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면 직성이 풀려 그대로 떨어져 잔다. 그러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 드는데 문제는 아침이 고달프다.
머리도 아프고 속도 쓰리고, 특히 술에 취해 횡설수설 떠들어댄 내 취중 모습이 기억나면 신체적인 괴로움과 합세해 더욱 나를 괴롭힌다. 술은 적당히 마셔도 탈, 폭주를 해도 탈, 왜 술은 꼭 마셔야 할까, 안마시면 안 될까? 술은 나쁜 물질이라고 결론내리고 다시는 안 마신다고 맹세를 한다.
그렇게 맹세를 해 봤자 길어야 3,4일 이다. 또 적당히 마시면 허전하고 쓸쓸함이 밀려오고 그래서 그 느낌 지우려고 더 마시려고 한다, 요요현상이라고 했던가, 며칠 안마시다 마시면 그 전에 못 마신 술을 다 마시려는 듯 폭주를 하는 경향이 있다.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병 아닌 병이다. 이 체바퀴 같은 생활 패턴을 바꿔야지 이대로 가다가는 시간 낭비이며 인생 낭비이다. 또 나이도 이순을 바라보는 만큼 건강이 언제까지 버텨 줄지도 의문이다.
건강이 무너지면 나를 믿고 살아 준 내 아내, 자식들에게 얼마나 큰 죄를 짓는 일인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빨리 이 생활 패턴을 벗어나야 한다. 등산을 다니든, 체육관에 다니든, 독서를 하든, 다른 취미생활을 키워 이 못된 생활습관에서 탈출해야 한다. 나는 바보가 아니기에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중독은 끊기 힘들고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됐을까,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셨을까,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40대 초반에서 시작 된 듯하다. 당시에는 사촌형과 많이 마셨는데 형이 서울로 가고 40대 중반에 영환이를 만났다.
그 친구는 그 전에도 만났으면서도 그렇게 가깝게 지내지 않았지만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서로 뜻이 맞는 것을 확인 후, 그 동안 못 다한 정을 나눠야 한다는 듯 거의 거의 매일 붙어 지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취미도 같았기에 더욱 그랬다.
봄이면 산으로 들로 나물 채취 다녔고, 낚시도 같이 다녔고 여름이면 계곡으로 바다로 가을이면 버섯 따러 다니고 겨울이면 등산, 이렇게 좋은 취미생활만 했으면 좋으련만 그 자리엔 항상 술도 같이 따라 다녔다.
나도 술을 좋아하고 그 친구도 술을 좋아했다. 좋아해도 보통 좋아하는 것이 아니기에 1차로 끝나는 경우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절대 없었다. 2차는 보통이고 3차까지 가야 직성이 풀렸다. 심하면 밤이 새도록 마신적도 있었다.
서로 같이 술을 못 마시는 때도 있었는데 그 때는 그 친구의 모임 과 나의 모임이 서로 다를 때였다. 그래도 우린 모임을 끝내고 2차에서 만난 경우가 많았다.
어느 땐가,
새벽 한시 쯤 되었을 것이다. 전화벨 소리가 어두운 적막을 깨고 요란히 울렸다. 밤에 오는 전화는 급한 전화 아니면 거의 잘못 걸린 전화나 스펨전화가 많다. 그래서 안 받는다.
그러나 진정 급한 경우라면 또 전화를 한다. 그 때는 뭔가 내 주위에 심각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므로 받아야 된다. 전화벨이 한참을 울리다 끊어지고 또 한참을 울리다 끊어지고 안 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전화를 받았다.
어렴풋이 눈을 떠 발신표시도 보니 영환이었다. 순간, 수많은 불길한 생각이 내 앞을 스쳐지나갔다. 아무리 술이 많이 취해도 예의는 지키는 친구인데 야심한 시각에 부부의 잠자리를 깨워 방해를 하는 것 보면 분명 큰일이 있다.
큰일은 큰일인데 좋은 일 보다는 자정이 넘은 시간이니 만큼 좋은 소식보다 나쁜 소식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조급한 마음에 잠이 확 달아났다.
"무슨 일 있니, 이 시간에 웬일이야?"
나의 예상이 맞는 것일까, 영환이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우울했다.
"좀 나와라 힘들어.."
생전 내게 힘드니 어쩌니 말하지 않은 친구였다. 그 만큼 자존심이 상당히 강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 친구가 힘들다고 한다. 이것저것, 따지고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 어디니?"
"너 네 집 앞,"
무슨 일로 내 집 앞까지 찾아 왔을까. 시각이 시각이니 만큼 나만을 깨우려고 초인종은 못 누르고 내게 전화를 한 것이다. 내가 깊이 잠에 든 사실을 알면서도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를 했다.
잠을 깨워서라도 꼭 하고픈 말이 있다는 것이다, 혼자 감당하기에 너무 힘든 일이 있기에 나를 찾아온 것이다.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가니 영환이는 내 예상과 달리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무슨 일이니, 왜 그래?"
그러자 그 친구는 전혀 엉뚱했다.
"무슨 일...! 있었지.. 그런데 너를 보니 심각했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하하.."
환하게 웃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 긴장했던 마음이 약간 풀렸다.
"무슨 소리야, 임마! 그럼 너 진짜 아무 일도 없어?"
"왜, 있었지.. 울고 싶을 정도로 우울하고 쓸쓸하고, 외롭고.. 그랬었지, 그런데 널 보니까 다 사라졌다. 술이나 마시러가자!"
실제 내가 나가기 전 까지 울적했음을 친구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눈물을 닦고 코를 훌쩍이고, 뭔가 있긴 있는데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다시 물었다.
"너 진짜 괜찮은 거야?"
그러자 그는 껄껄 웃기까지 했다.
"진짜로 괜찮아 졌다니까 임마.. 고맙다, 새끼야, 나와 줘서..!"
짧은 시간에 폭풍이 지나간 기분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뭔가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사람 좀 놀래키지 마라, 깜짝 놀랬자나 임마!'
자다 말고 봉창 두드린다 했던가, 친구 따라 호프집에 향했다, 무슨 일로 날 불러냈는지, 왜 울고 싶도록 우울했는지 궁금증이 발동했으므로 안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의 궁금증은 술을 다 마시도록 해소할 수 없었다.
그는 술에 많이 취했음에도 혀가 약간 꼬부라져 발음이 부정확 할 뿐 허튼 소리가 전혀 없었다. 술이 취하면 내게 다 털어 놓을 것이란 기대는 무너진 것이다. 그냥 소주 마시고 맥주도 마시고 늦은 시각에 노래방 까지 갔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 열두시쯤, 그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칼국수 먹으러 가자!"
나는 픽, 웃었다. 어제 술 그렇게 처먹었으니 얼큰한 칼국수가 먹고도 싶겠다. 칼국수 집에 도달하니 그 친구는 먼저 와 있었다.
"너 머리는 괜찮으니? 나보다 많이 마셨으니 힘들겠다."
그 친구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침묵하다 말을 했다.
"무슨 얘기야, 나 어제 술 많이 마신 걸 네가 어떻게 알아?"
이게 무슨 뚱딴지? 어이가 없어 나 역시 그 친구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얘가 미쳤나? 어제 나랑 마셨잖아 임마!
그러자 그 친구는 또 한참을 침묵 하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너랑 마셨다고, 난 기억이 없는데?"
너무도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은 나,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어제 호프집에서 실컷 마시고 노래방 까지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데 전혀 기억이 없다니 일부러 거짓 말 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거짓말을 하는 친구가 아니었다. 난 기억을 더듬어 줄 필요가 있었다. 서둘러 내 핸드폰을 꺼냈다.
"너 이거 봐봐! 네가 어제 내게 걸었던 내용이야."
내 핸드폰에 수없이 전화했던 내용이 나열 되어있다. 그 친구는 그 내용을 물끄러미 보다가 자신의 전화기도 꺼내 들었다. 보나 마나 새벽 한시에 내게 전화를 건 내용이 쭉 나열 되어 있었을 것이다. 휴~!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어제 나 많이 마셨니?"
난 친구에게 사실대로 설명했다. 앵커맨에서 맥주 소주 마시고 지하 노래방까지 간 내용을 설명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심각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머리를 가로 저었다.
"기억 안나. 노래방 까지 갔었니? 나 술 끊어야겠다."
하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대단한 친구였다. 그렇게 기억이 없을 정도로 술을 마시고도 실수하나 없었다. 실수커녕 노래도 또박또박 잘 부르고 춤도 신나게 추고 정말 존경스러운 친구였다.
그 친구에 비해 나는 어떤가, 술 조금 취하면 횡설수설 하고 잘난 척하고, 술 취한 다음날이면 그 실수가 생각나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들 정도다. 그러나 아무리 실수를 많이 해도 그 친구랑 마시면 괜찮았다.
그 친구는 실수를 하지 않기에 내 실수가 그 친구를 비롯해 희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친구랑 2차, 3차를 가도 부담 없이 간다. 전 날 만취했음에도 다음 날 속이 거북하고 머리만 띵 할 뿐 취중의 실수는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실수 했다 해도 그 친구가 다 해결 했을 것이다.
그 친구는 떠났지만 아직도 내게 2차까지 같이 가는 고마운 친구들은 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나와 비슷한 친구들이다. 특별할 게 없는 술에 취하면 횡설수설 이야기가 두서없다. 거기 개똥철학이나 뒤섞이면 시끄러운 광포일 뿐이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난 줄 착각 하고 한참 듣다보면 아까 들었던 이야기가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이어지고 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술에 취했음에도 내 이야기에도 질려 버리고 친구 이야기에도 질려 버린다. 그래서 2차 까지도 굳이 가고 싶은 생각도 서서히 멀어지게 된다. 아침에 고달픔을 생각하면 차라리 어정쩡한 기분으로 끝내는 편이 낫다고 생각된다.
오늘도 술에 어정쩡하게 취해 걷고 있다. 혼자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 길, 이제야 그 때 그 친구의 심정을 알 것 같다. 아마 지금의 내 심정과 같았으리라. 외롭고 쓸쓸하고 허전해서 술 한 잔 더하고 싶은데, 그런데.,..? 전화 할 친구가 없다.
지금의 내 심정이 그 때 그 친구의 심정과 같았을 것이다. 이럴 때 그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전화만 하면 아무리 가까운 다른 친구와 약속 있어도 내게 달려왔던 그 친구, 자신이 올 수 없는 상황이면 같이 있는 다른 친구의 의사와 상관없이 나를 불렀던 그 친구, 애인과 같이 있어도 포기하고 내게 달려 왔던 그 친구,
나는 술에 중독되기보다 그 친구에게 중독되어 있다.
그 친구가 떠나고 2년이 다 되었는데 그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 하고 있다.
그 친구랑 술 한잔 하고 싶다.
그 친구의 혼이 나타나 나를 데려 간다 해도 그 친구랑 술 한잔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