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의 살던 고향은

산으로 강으로 2013. 9. 30. 19:15

나의 살던 고향은 남한강이 앞에 유유히 흐르고 뒷에는 사오랑산이 우뚝 서 있는, 동네 이름은 막의실,

주소는 충북 중원군 동량면 화암리 (막의실)

막의실이란 뜻은 옛 선조님께서 연산군 어머니 폐비윤씨 에게 사약을 전했다는 이유로 온 집안이 역적으로 몰려 풍비박산 되었을 때 화를 피하기 위해 정처 없이 강을 따라 피난 와 머물다 간 곳 이라고 한다.

천막을 치고 먹는 것은 산열매에 의지하며 살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 막의실, 아버지께 전해 들었다.

그 막의실이 지금은 마그실로 개명되어 불러지고 있다. 마지막재가 마스막재로 변형되듯..

그 이유에서 인지 그 동네에는 광주이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강 건너 앞에 보이는 동네는 충주시 종민동 이었고 강 건너 조금 올라가면 충북 중원군 살미면 목벌리,

강을 건너지 않고, 조금 위로 올라가면 충북 제원군 한수면 포탄리가 있었다.

이렇게 하나의 시와 두 개의 군을 사이에 두고 살았다. 모르는 사람이 이 글을 보면 하나의 시와 두 개의 군을 사이에 둔, 큰 부락인 줄 알겠지만 글 표현과 달리 내 고향 막의실은 강촌이었다.

수몰로 이사 갈 때 까지 전기도 안 들어왔기에 밤이 되면 석유로 불을 켜는 등잔불이나 촛불로 어둠을 밝혔고 세상 돌아가는 뉴스는 대부분 라디오에 의존해야 했다.

신문도 있었으나 우편으로 배달되기에 며칠 지난 뒤에 배달되는 것을 상식으로 받아 들여야 했다.

경운기 트랙터는 강 건너 구경거리에 불과했다.

큰 배가 없었기에 무거운 기계를 배에 실지 못하니 강을 사이에 두고 한 쪽에선 기계화 농사를 지었어도 한 쪽에서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지어야했다.

당시에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었지만 초가집 지붕만 걷어냈지 길을 넓혀도 리어카나 경운기가 다닐 수 없었기에 푸른 동산 가꾸자는 노랫말 가사는 아무런 의미 없이 허공에 울려 퍼지는 노래에 불과했다.

농사를 지어도 원시적이었다.

밭과 논을 갈아도 소로 했고, 운송수단은 대부분 지게를 이용했다.

방아를 찧으려면 나루터가 있는 약 2km되는 윗동네까지 올라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서 민개라는 동네 방앗간을 이용했고, 물이 불어난 장마철에는 강을 건너지 않고 제원군 살미면 포탄으로 갔는데 소에 볏가마를 얹고 사람은 지게에 지고 힘들게 운반해야 했다.

이것이 힘들다면 동네에 있는 재래식 디딜방아로 방아를 찧었는데 장정 두 명과 아녀자 두 명이 하루 종일 찧어야 벼 한 가마를 찧어 쌀을 만들 수 있었다.

어쩌다 발동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는데 6월 초여름으로 기억된다.

6월이면 발동기에 피댓줄 걸어 보리타작하는 기계가 있었는데 그 무거운 발동기를 그 대로 운반할 수 없기에 기계를 분해 해서 들것으로 장정 네 명이 어깨에 메고 으여차, 으여차, 소리를 내며 힘겹게 집집마다 옮기며 보리타작을 했다.

기계가 없을 땐, 수작업으로 보릿단을 납작하게 생긴 큰돌에 패대기치며 털다가 기계로 터니 얼마나 쉬웠던지 기계혁명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기도 했다.

가을이 되면 새벽부터 벼 타작하는 와랑기계 소리와 함께 일꾼들의 함성소리로 하루가 시작된다.

당시에 벼농사는 농작물 중 최고의 작물로 여겼기에 벼 타작 하는 날은 잔칫날 분위기였다.

평소에 먹기 힘든 쌀밥에 고깃국, 막걸리도 이 때 만큼은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잔칫집 분의기와 달리 일은 상당히 힘들었다.

지금도 누가 내게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냐 물으면 난 주저 없이 옛날 벼 타작 하는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일을 계속 했더라면 아마 전국 마라톤 대회에 나가도 상위로 입상하는 것은 무난할 것 같다.

새벽부터 발로 와랑기계의 발판을 밟고 손으로 볏단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털고, 마지막으로 볏단 가운데를 쫙 벌려서 속에 숨은 낟알까지 남김없이 털어야 했고, 힘들면 밟는 다리를 왼다리에서 오른다리로, 오른다리에서 왼다리로 바꾸어 밟고, 더 힘들면 볏단 떼는 상대와 자리를 바꾸고, 도리깨질, 갈퀴질, 볏단 묶어 던지지를 번갈아했고, 깔끄래기는 땀에 젖은 몸에 여기저기 달라붙고, 가렵다고 긁으면 더 가려웠다.

저녁이 되어 어둠이 내리고 수북이 쌓인 낟알을 풍구로 골라 볏가마에 담고 창고에 쌓으면 일은 마무리 된다.

이 쯤 되면 온 몸은 땀과 함께 깔끄래기 먼지로 뒤집어쓴다.

목욕을 해야 하는데 요즘 같이 따듯한 물을 기대하면 안 된다. 때는 10월 중순이나, 하순, 들판엔 서리도 내리는 추운 날씨였다.

아무리 추워도 더럽혀진 몸을 씻기 위해 목욕은 해야 된다.

비누 한 장과 볏단 한 단을 들고 그 추운 강가로 향했다.

볏단은 목욕하고 난 뒤에 불을 집혀 추운 몸을 덥히기 위함이다.

그래도 당시에는 춥다는 감각은 접어두고 목욕을 해야만 했다.

자연재해에는 얼마나 약했던가?

가물어 농작물이 말라 비틀어지면 물지게로 밭에 물을 퍼다 주어야했고 물과 거리가 먼 밭은 이마저 생각조차 할 수 없었기에 하늘만 쳐다보며 원망해야 했다.

장마가 지면 또 어땠나?

남한강을 가까이 두고 살았기에 강물이 많이 불어나면 동네는 그대로 고립된다.

길도 수장되고 뱃길도 끊기기 때문이다.

물이 어느 정도 줄고 뱃길이 열려도 보통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불어난 물 때문에 뱃길이 하루에 서너번밖에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다 시내에 다녀오려면 나루터가 있는 윗동네까지 불어난 개울을 건너기 위해 신발 벗고 양말은 벗어 주머니에 넣고 바지는 접어서 위로 걷어 올리고 건너야했다.

장마로 소실된 변형된 길은 풀숲을 헤쳐 길을 만들며 가야했다.

배를 타려고 바삐 발걸음을 옮기는데 나루터에 배는 이미 띄어져 있을 때의 그 절망감이란..?

나는 이런 동네가 너무 싫었다.

밤이면 전기불도 없어 귀신과 도깨비가 존재하는 동네,

길이 좁아 리어카커녕 자전거도 제대로 다닐 수 없는 동네,

아무리 내가 태어난 고향이라고 해도 현대의 문명 혜택을 전혀 누릴 수 없는 이런 동네가 너무 싫었다.

그러던 차에 충주댐 건설 소식은 너무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어서 빨리 충주댐이 건설 되어 이 지옥 같은데서 탈출해야 되는데 건설의 속도는 왜 그렇게 더디게 진행되던지...

이 고향을 떠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으리라.돌아서서 침도 안 뱉으리라 ..

타향에 가면 고향의 그리움을 느낀다고 했지만 당시에는 너무도 지긋지긋 했다.

그 지겨움도 지나고 나니 잠시였다.

충주댐이 건설되고 토지 보상받고, 멀지도 않은 충주에 보금자리를 잡았다.

한번 떠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으리라 여겼던 내가 태어나고 내가 자란 내 고향..

즐겁고 아름다운 기억보다 어렵고 힘든 기억의 장소로 기억되는 한 맺힌 내 고향 ..

그 한 맺힌 고향이 진한 향수로 되 살아 나리라곤 그 때는 상상도 못했다.

올뱅이 먹고 싶으면 바가지 하나 들고 강가에 나가면 바가지로 가득, 돌맹이 하나 안 들추고 쉽게 잡을 수 있었다.

물고기 잡고 싶으면 맨손으로도 쉽게 잡을 수 있었던 내 고향.

낚시는 요즘처럼 낚싯대와 받침대, 고기망이 있는 거창한 낚시가 아니라,

낚싯줄 끝에 작은 돌을 추로 달고, 그 위에 낚시 두개 달린 일명 떵벙낚시.

그 시시한 낚시도 요즘 돈 내고 하는 낚시보다 훨씬 맛있는 고기를 훨씬 많이 잡았다.

여름이면 민개 앞 여울이나 그 아래 종민동 앞 여울에서 하는 사리치기(쉬리) 낚시는 너무 재미있었다.

이 추억을 되살리려 강원도 영월로 낚시를 가지만 옛 고향 같지는 않았다.

영월 동강도 댐을 건설하려 했으나 환경단체와 주민의 반대로 무산 되었다고 한다.

충주댐도 건설이 무산되었다면 어떻게 변했을까?

강 건너에는 충주에서 민개 강가를 거쳐 월악산 까지 2차선 도로가 건설 됐을 것이고 우리 동네는 동량면을 거쳐서 충주 코타와 미라실로 잇는 2차선 도로가 건설 됐을 것이다.

2차선 시멘트 다리도 우리 동네에서 월악산 까지 적어도 서너 군데 건설 되었을 것이다.

식당도 여기저기 만들어지고, 동강 같은 레프팅도 만들어지고, 전원주택도 여기저기 지어졌겠지. 그렇게만 되었다면 충주지역 아니, 전국 모든 사람들이 찾는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을 텐데..

아아~~! 현재의 내 고향은 어두운 물속에서 아무 말이 없다.

끝.

p.s

옛날 친척동생 승수와 나의 대화내용.

승수: "헝아야, 난 봤어!"

나: "뭘 봤는데?"

승수; "탕탕탕탕~ 하면 막 가!" (경운기 보고 하는 소리)

나: "나도 봤어!"

승수: "난 만져 봤어!"

나: "나도 만져 봤어!"

승수: "난, 타 봤어!!"

나: "대단한 영광이구만~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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