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어머니의 노래

산으로 강으로 2013. 9. 30. 21:28

"엄마, 난 왜 외갓집이 없어? 나도 외갓집에 가고싶어!"



방학만 되면 동네 친구들은 제일먼저 외갓집에 다녀왔고 외가 집 풍경이나 가족사항에 자랑을 하면 부럽기만 했다. 어린 나이에 상상하는 외갓집은 사촌형제들이 사는 작은집 보다 더 가까운 곳으로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반겨주는 천국 같은 곳으로 비춰졌다.



친구들이 외갓집에 가면 홀로 지내야했기에 외갓집에 가지 못하는 나는 왠지 불행한 느낌이었다. 분명 엄마도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은 아니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계실텐데 왜 외갓집이 없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외조부께서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외삼촌이나 이모는 계실텐데 나는 외갓집을 모른다. 따라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외삼촌 이모도 모른다.



이유를 몰랐던 나는 외갓집에 가고싶다고 방학만 되면 졸다댔고, 어머니는 더 피할 수 없었는지 나를 외갓집에 데려다 주셨다. 외가 집에 도착하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외삼촌 이모 그리고 사촌들이 반겨 주리라 예상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가 계셨지만 외할머니가 아니셨고 할아버지가 계셨지만 외할아버지가 아니셨다.



속았다는 생각에 가짜 외갓집에서 나와버렸고 울면서 집으로 가자고 졸라댔다. 엄마는 당황해 어쩔 줄 모르셨다. 나는 대문 밖에서 가짜 외갓집이 싫다고 가자며 크게 울고있고, 내 말을 듣자니 교통편이 끊겨 돌아갈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곳은 아버지의 외갓집이었다. 그러니 그곳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이모나 삼촌이 계실 리 없다. 어머니께서는 친정이 없음에도 왜 내게 가짜 외갓집에 데려다 주며 숨기려 하셨는지 그 때는 몰랐다.



외할아버지는 일제 시대에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감옥에서 눈을 감으셨다. 어머니의 단 하나뿐인 동생이 계셨는데 중학교 교사였던 이모는 6.25동란에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는 화병을 앓다가 의지할 곳 없어 마지막 혈육 딸의 집, 우리집에서 돌아가셨다.



내가 그토록 찾았던 외갓집은 외할아버지 감옥에 가시면서 사라진 것이다. 그러니 해방되기도 전에 나의 외갓집은 없었다.



집안의 명예를 중시했던 옛날, 어머니 나이 17세에 양반의 종갓집이라고 외할아버지께서 시집을 보내셨지만 뼈대있는 집안이라고 시집살이가 편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 나이 16세 할머니 나이 40세였고. 할아버지께는 어머니께서 시집오기 5년 전에 돌아가셨다.



시아버지 안 계신 젊은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도 만만찮을 테고, 시도 때도 없이 돌아오는 제사에 시달리는 어머니 고달픔을 어린 남편인 아버지는 어떻게 헤아렸을까? 하소연할 친정이 없는 어머니의 시집살이는 설명을 안 해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친정이 없으면 뿌리가 없는 나무처럼 주위에서 업신여길까 두려워 감추고 또 감췄을 것이다.누구에게도 말하기 싫은 어머니의 친정이야기, 마음의 상처는 세월이 흘러야 치료가 된다. 세월이 흘러 친정에 대한 그리움과 괴로움도 잊혀질 즈음, 막내아들의 외갓집 타령은 어머니의 새로운 열등감으로 싹트기 시작했다.



자신의 친정 없는 설음을 자식의 외갓집 없는 설음과 같이 여겼을 테고 자신은 친정 없는 어려움에 살았지만 자식에겐 외갓집 없는 설음은 물려주기 싫었으리라. 그래서 택한 곳이 아버지의 외숙부와 외숙모가 계시는 아버지의 외갓집.



내가 철이 있었다면 어머니의 마음을 읽고 아버지의 외갓집도 나의 외갓집이라 여기고 좋아했어야 했는데 철이 없었던 나는 속았다는 마음에 크게 실망하고 울다 지쳐 아버지 외갓집에 앓아 누었으니 어머니의 아픈 심정은 아리고 또 쓰렸을 것이다.



친정의 대한 열등감 때문인지 어머니께선 가슴앓이를 많이 하셨다. 명치끝이 아파 수많은 병원을 찾아 다녔지만 끝내 뚜렷한 병명은 찾지 못했다. 병원에서 찾지 못한 병명은 친정 잃은 설음에서 오는 스트레스, 화병이 아니었을까?



연이은 딸 출산으로 어머니의 시집살이를 더 힘들게 했을 것이다. 대를 이을 종가 집의 종손출산 바램은 당연했기 때문이다. 힘들어도 속상해도 어디 하소연 할 곳 없는 어머니의 시집살이, 어머니의 한은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다. 시집살이는 육체적 고통으로 견딜 수 있겠지 자식 잃은 정신적인 고통은 사람이 겪는 스트레스 중 가장 크다고 했다. 딸 둘을 낳고 아들 둘을 낳았지만 똑똑했던 첫째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당시의 큰형 나이는 35세였다.



결혼도 못 시키고 일찍 가슴에 묻어야만 하는 어머니의 고통, 불에 태운 아들의 뼈 가루를 선산에 뿌릴 때의 그 심정을 어떻게 표현을 해야할까? 명치끝의 끊어져 나가는 고통은 참을 수 있겠지만 자식을 가슴에 묻고 평생 살아 가야하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자주 우셨

"명수야, 명수야!"

돌아올 수 없는 죽은 형을 찾으며 어머니는 그렇게 울고 계셨다. 아버지 몰래 자식들 몰래, 그러다 들키면 서둘러 얼굴을 가리지만 한번 터진 울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기에 감출 수 없었다.



둘째 아들은 월남전에 다녀오고 전쟁의 후유증인 정신이상으로 같이 살 수 없었다. 큰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작은 아들마저 잃을 수 없어 수없이 병원을 들락거렸고 고치려 노력했지만 감당 못할 치료비와 연이은 재발에 포기하기에 이른다.



요즘은 보기 드물지만 예전 할머니들은 마루나 봉당에 걸터앉아 신세 타령하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떤 년은 팔자가 좋아 시어머니 몰래 떡 사먹고, 어떤 년은 팔자가 나빠 시어머니 몰래 떡 사먹다 들키고.. 왜 생겼나, 왜 생겼나, 이다지도 못생길 걸 왜 생겼나.."



가사는 자신의 심정에 담아 세상살이 욕하고, 돌아가신 시어머니 욕도 하고, 아버지 욕도 하고, 감정이 격해지면 손 바닥으로 땅을 치며 통곡하며 부르기도 했다. 그러다 개가 앞에서 알짱거리면 언제 울었냐는 듯 언행과 표정은 평상으로 돌아온다.

"요놈의 개새끼! 저리안가?"

부지깽이를 들고 대문 밖 멀리 까지 내 쫓고 나간 김에 애들도 부른다.

"얘들아, 밥 먹어라!"

시간이 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신세타령을 이어가기도 하고, 스트레스가 다 풀렸다 싶으면 다시 부엌으로, 안방으로 일상생활로 돌아간다.



내 어머니도 이런 분 중 한 분이었다. 나는 이 신세타령이 듣기 싫어했다. 큰형 돌아가시고 작은형 멀리 보내고 어머니의 신세타령은 부쩍 더했다. 어머니의 신세타령의 마지막은 큰 형을 찾았다.

"아이고~ 명수야, 명수야!"

그만 하라고 말리면 감정이 더욱 격해져 말릴 형편도 못 됐다. 차라리 그 자리를 피하는 게 편했다.



어느 날, 낮에 시작된 신세타령이 밤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너무 듣기 싫어 그만하시라고 했지만 감정은 더욱 격해서 큰 소리로 우시고 한번 터진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너무도 화가나 어머니께 크게 저항했다.



"엄마, 두 아들 보낸 게 그렇게 가슴아파? 내가 더 아프게 해 줄까? 나도 죽을게, 그럼 엄마 신세타령도 그치겠지!"

그 말에 어머니는 충격을 받은 듯 신세타령이 뚝, 그쳤다.

"아이구, 이놈아! 그게 무슨 소리여? 해 버릴 소리라도 그런 말 말어!!"

"그럼 제발 그만해, 그럼 안 죽을께!"

"그래 알았다, 안 할께!"



의외로 어머니의 신세타령은 말 한마디에 쉽게 그쳤다. 기선을 제압한 나는 한 수 더 떴다.

"방에만 있지 말고 밖에 바람 좀 쐬고 한바퀴 돌고 와!"

"그래.. 그래.. 알았어!"

어머니는 내 말 한마디에 꼼짝 못하고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셨다. 이 후에 어머니의 신세타령은 점차 사라졌다. 내가 없을 때 하다가 내가 들어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뚝, 그치신다.



어머니 삶에 고통과 절망만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결혼하고 아내가 임신을 하자 어머니는 크게 기뻐하셨다. 임신 확인 후 병원에서 나오는 어머니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워 보였다. 얼굴엔 환한 웃음을 되찾았고 목소리도 맑고 경쾌했다.



첫째 딸아이를 출산하고 연이어 임신, 둘째 아이는 아들이란 발표에 어머니는 감정이 격해 눈물까지 보이셨다. 이 눈물은 분명 평소에 흘리던 눈물과 다른 눈물이었다. 두 아들을 잃고 절망 속에 인생을 사지다 그토록 기다렸던 손자를 70세가 훨씬 넘은 나이에 봤으니 어찌 감정이 격하지 않겠는가?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몸조리를 가려했으나 손자와 같이 있고싶어 며느리 몸조리를 직접 하시겠다는 어머니, 며느리가 친정이 편하다고 하자, 며느리만 보내고 갓난애를 자신이 키우겠다고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우신 어머니, 며느리를 친정 보내고 손자가 보고싶어 잠 못 이루다 새벽에 사돈댁으로 달려가신 어머니.



두 아들의 사랑이 손자 하나에게로 향한 듯 어머니는 그렇게 손자를 귀중히 여기셨다. 늘 가슴이 아파 얼마 못 살 것 같던 어머니는 손자를 안고 마지막 소원을 말씀하셨다.



손자가 노랑모자 쓰고 유치원 가는 모습보고 죽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어머니는 손자가 노랑모자 쓰고 유치원 가는 모습을 보셨다. 그러자 어머니의 소원을 한 단계 높게 업그레이드 시켰다.



손자가 초등학교 가는 모습보고 죽고싶다고..

어머니는 손자가 초등학교 가는 모습을 보셨다. 그러자 또 소원을 더욱 높게 업그레이드 시켰다.



손자가 교복입고 중학교 가는 모습을 보고싶다고..

어머니는 손자가 교복입고 중학교 가는 모습을 보셨다.



그리고.

더 살고 싶은 꿈은 접으셨다.



어머니는 손자 손녀가 유치원부터 중학교까지 등교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낙으로 사셨다. 손녀, 손자가 하교시간이 되면 밖에서 기다리다 같이 들어오신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몇 일 전에도 아픈 몸을 이끌고 손자 등교하는 모습을 보셨다.



어머니 나이 88세 되던 해 2002년 봄

어머니는 앉아서 무언가 중얼거리셨다. 몇 일 앓으신 어머니의 힘없는 소리는 잘 들을 수 없어 귀 기울여 어머니 입을 중시했다. 눈가에 이슬이 맺히고 입에서 힘없이 흘러나오는 소리...

"명수야, 명수야!"

어머니는 큰아들을 찾고 계셨다. 어머니는 손자 크는 모습에 지난날의 한은 잊은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손자와 함께 웃으며 지내셨지만 가슴속 한 구석에 늘 아픈 상처는 안고 사셨다.



형을 찾아가셨는지, 외조부님 찾아가셨는지, 진달래꽃, 벚꽃이 만개한 어느 봄날, 어머니는 그렇게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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